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 개입]]: 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 ==== > В 1980 году Любовь Брежнева задала своему отцу нелицеприятный вопрос об Афганистане. Яков Ильич принялся оправдывать брата... «Справедливости ради хочу сказать, — пишет Любовь Брежнева, — что дядя мой звонил ежедневно Дмитрию Устинову и, употребляя общепринятый фольклорный диалект, спрашивал: «Когда эта блядская война кончится?». Злясь и краснея, 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 кричал в трубку: «Дима, ты же мне обещал, что это ненадолго. Там же наши дети погибают!»… > > > 1980년 류보피 브레즈네바는 부친에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돌직구성 질문을 던졌다. 야코프 일리치는 자신의 형제를 정당화하려 애를 썼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 말해 두자면 말이다", 류보피 브레즈네바가 기술했다. "내 삼촌은 매일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통속적인 어투를 구사하며 물었다. "이 씨발놈의 전쟁이 대체 언제 끝나는데?" 소련 서기장은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전화기에 외쳤다. '''"디마,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죽어나가고 있다고!"'''[* 디마는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이는 브레즈네프 리더십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그는 고위 정치국원들을 친구처럼 애칭을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했다. 물론 수슬로프와 코시긴처럼 자신이 어렵게 여긴 인물들에겐 경어를 썼다.] >----- > 브레즈네프의 조카딸 류보피 브레즈네바의 증언.[[http://web.archive.org/web/20080830181434/http://www.novayagazeta.ru/data/2002/83/42.html|#]] 이렇게 데탕트 외교로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 가지 거대한 오판으로 데탕트의 완전한 붕괴는 물론, 나중에 소련 멸망의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에 무력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사실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아프가니스탄 친소정권]]에 군사개입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프간의 헤라트 시와 주변 지역이 친소 정권에 맞선 반란을 일으켰고, 폭도들은 잔혹하게 카불의 관리, 소련 고문들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에 아프간의 대통령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는 모스크바에 소련의 군사 개입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이는 개입에 관심이 없던 브레즈네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정치국은 이 새로운 사태를 분석할 준비도 되지 않았었다. 이에 정치국에서는 3주 동안이나 계속 아프간 개입에 논의를 한 결과 아프간에 군사 개입은 하지 않고, 추가 지원만을 약속했다. 그리고 [[파키스탄]]과 [[이란]]을 압박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간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아프간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아프간 친소혁명을 이끌던 타라키 아프간 대통령이 하피줄라 아민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태껏 소련은 아프간 대통령인 타라키와 회담을 했으며, 타라키의 친소적인 행보에 브레즈네프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여긴 정치국은 강하게 분노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에 포섭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민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구하겠다는 입장이 큰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국이 우스티노프-안드로포프 계획을 승인했다. 만약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아프간이 친미 국가가 되고, 아프간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된다면, 사실상 소련 전역이 미국 핵미사일의 공격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브레즈네프도 개입 결정에 서명을 하면서 소련군이 아프간으로 파견되어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다만 브레즈네프는 아프간 개입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으로 대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어떤 군사 개입도 최후에 의지할 수 있는 무기라 여기고, 승리를 위해 치르는 대가는 승리 자체보다도 언제나 크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래서 맨처음에는 아프간 개입을 주장한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가 브레즈네프를 아프간 개입에 찬성하도록 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먹었다. 특히 안드로포프는 놀라울 만큼 사실 여부가 희박한 증거와 정보들을 이용해 브레즈네프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침공이 개시된 후 브레즈네프는 아프간 개입이 엄청난 실수[* 아프간 침공 전 부터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인해 그동안 브레즈네프가 모든 정치 생명을 바쳤던 초강대국 데탕트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였음을 깨닫고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이때는 정치가로서 브레즈네프의 경력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좀 깨어있던 관리들은 소련이 이 험난한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적을 기다렸다고... 무엇보다 이 개입은 사실 정치국에서도 격론이 있었고, (한 표 차로 찬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제정세로 봐서도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정점에 이른 소련군의 전력을 과신한 것이 탈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개입하도록 하는 미국 CIA의 공작도 있었다고 나중에 카터 행정부의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가 밝혔다. 결과적으로 10년간 소련군은 악전고투하다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후 고르바초프 재임 시기인 1989년 철군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